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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1박 2일간의 여행] -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

JS.Gooni 2014. 8. 11. 20:56

 

 

대마도..

 

우리 나라와 정말 가까워 우리의 문화가 많이 흘러와 비슷할 것이란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우리나라의 역사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였음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특히 이번 코스는 나에게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게 만들고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대마도 [1박 2일간의 여행] 그 여덟번째 코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이즈하라 현 시내 가네이시 성터내에 위치]

 

 

 

 

 

 

 

 

 

 

일본의 성의 특징이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로 이렇게 냇가를 형성하는게 특징.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이러한 성벽이 유지되고 있는 곳

 

 

 

 

 

 

 

 

 

 

 

 

가네이시 성터로 들어가는 입구

 

옛모습을 유지 하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라 한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한쪽에 위치한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 [德惠翁主,1912.5.25 ~ 1989.4.21]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高宗)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호칭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즉조당(卽祚堂)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네이버 지식백과] 덕혜옹주[德惠翁主] (두산백과)에서 발췌

 

 

 

 

 

 

 

여기서 잠깐 덕혜옹주에 관한 사진과 이야기를 살펴보자.

 

 

 

 

 

 

 

 

 

고종황제를 그대로 닮았다던 덕혜옹주의 돌사진

 

 

 

 

 

 

 

 

 

 

일출소학교 시절의 모습

 

 

 

 

 

 

 

 

 

 

일본식 교육을 받아여 했고 그래서 기모노를 입을 수 밖에 없었으며

 

고종황제의 승하 이후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게된 덕혜옹주

 

 

 

 

 

 

 

 

 

대마도 백작 소오 다케유키 (종무지) 와의 정략결혼

 

(소오 다케유키의 모습을 지워 버린 사진)

 

 

 

 

 

 

 

 

신혼여행으로 대마도 방문 때의 모습

 

(덕혜옹주의 사진 자료에서 유일하게 웃고 있는 사진)

 

 

 

 

 

 

 

 

 

그리고 37년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하던 모습

 

 

 

 

이렇듯...

 

후궁의 핏줄이라 공주가 아닌 옹주로 불려야 했고,

 

시대의 희생양으로 황적에도 오르지 못해 태어나서도 이름이 없었던 여인,

 

5살이 되어서야 그제야 덕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여인,

 

아버지인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보온병의 물만 마셨던 여인,

 

어머니인 양귀인이 황족,친족이 아니라 하여 어머니의 3년 복상도 하지 못했던 여인,

 

하나뿐인 딸에게도 외면당하고, 오랜 시간 정신질환으로 인해 감금생활을 해야 했던 여인,

 

결국 남편에게도 외면당하고, 나라에서도 외면당해야 했던 비련의 여인 덕혜옹주...

 

 

 

 

 

 

 

 

 

 

권비영 작가의 소설 [덕혜옹주]

 

책장 한켠에 있어도 무심히 지나쳤던 이 책에

 

이제서야 관심을 가지게 되다니..

 

이번 대마도 여행에 의해서 더욱 깊게 알게된 덕혜옹주..

 

 

 

 

 

 

[덕혜옹주에 대한 실제 기록들]

 

나는 깜짝 놀랐다. 몇 년 전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를 매료시켰던 생기발랄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본말로 인사했으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내가 다시 한국말로 "먼 여행 오시느라 피곤하신가봐요?" 했으나

옹주는 미소조차 띠지 않았다. - 이방자(마사코)여사의 말

 

덕혜옹주는 학교 식수를 사용하지 않고 매일 팔팔 끓인 물을 보온병에 담아갔다.

왜 보온병을 들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식수에 독이 있을까봐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전 오빠(순종)처럼 독을 먹다 죽기는 싫습니다"하고 대답했다.

- 일본 학습원 동료의 말

 

가을 학기가 시작됐으나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종일 누워 있고 먹지도 않고 때로 밤에 갑자기 밖으로 뛰어 나가 뒷문으로 해서 아카사카미치케 방면으로 걸어가고 하는 일이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어 정신과 진료를 받게 했다. 의사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이라고 했다. - 이방자(마사코)여사의 말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모셔가기 위해 이승만 정부에 귀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은 왕실 재산을 국유화하고 황족들을 천대했다.

이씨 왕가의 자손들은 해방이 되고도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박정희를 만나 덕혜옹주 이야기를 청했다.

박정희가 물었다. "덕혜옹주가 대체 누구요?"

나는 대답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녀입니다.

- 김을한의 말

 

감옥과도 같이 음산한 공기가 떠도는 중환자가 있는 병실은 감방 모양 쇠창살이 들창을 막고 있었다.

안내해주는 간호부의 뒤를 따라갔는데 한 병실 앞에서 간호부의 발이 딱 멈추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40여 세의 한 중년부인이 앉아 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데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 부인이 바로 덕혜의 후신인 것이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여러 해 동안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던 옹주를 생각하니 어찌나 가엾고 불쌍한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만일 고종황제가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얼마나 슬퍼했을까. - 김을한의 말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 일생이 슬퍼요. - 이방자(마사코)여사의 말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있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 덕혜옹주의 말

 

 

 

 

 

 

절대 잊어선 안 될 잊지 말아야 할

 

우리 나라의 마지막 황녀이다..

 

 

 

짧은 여행에서 이렇게 많은 것을 느끼게 되다니

 

대마도..  정말 값진 여행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