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1박 2일간의 여행 - 그 일곱번째 코스
[최익현 선생 순국비]
[이즈하라 현 시내에 위치]
[최익현]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봄직한 이름일 듯하다.
나 역시 이름은 들어봄직한데 그 외는 전혀 생소한 일들...
그래서 더욱 이번 여행이 내 가슴을 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목과 같이 대마도에 있는 우리나라 선생의 순국비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익현]
1833(순조 33)∼1906.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독립운동가)
74세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민족혼 일깨운 조선후기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경기도 포천 출신. 대(岱)의 아들이다.
6세 때 입학해 9세 때 김기현(金琦鉉)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다.
14세 때 경기도 양근(楊根)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 擊蒙要訣≫·≪대학장구 大學章句≫·≪논어집주 論語集註≫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이후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사헌부장령·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70년(고종 7)에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수봉관·지방관·언관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특히 1868년에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 상소는 그의 강직성과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다.
1873년에 올린 <계유상소 癸酉上疏>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서원의 철폐를 대거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제수되어 누적된 시폐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권신들이 반발해 도리어 대원군 하야를 부자이간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에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 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민씨 일족의 옹폐를 비난했으나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73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였다.
첫 시도로서 1876년 <병자지부복궐소 丙子持斧伏闕疏>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였다.
이 상소로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꺾이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개국 이래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운동·청일전쟁 등 연이어 일어나 국내외 정세가 복잡했던 때이다.
특히 1881년에 신사척사운동이 일어나면서 위정척사사상이 고조되고 있을 때 그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항일투쟁의 지도이념으로 성숙하였다.
이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고루하거나 보수적이지 않은 것은 보여준다.
또, 항일정치투쟁방법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 수단에 의한 개인적·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집단적·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위정척사사상도 배외적인 국수주의로부터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각된 민족주의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오랫만의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 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당시 올린 상소는 1896년에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 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1898년 <사의정부찬정소 辭議政府贊政疏>와 재소, <사궁내부특진관소 辭宮內府特進官疏>와 재소,
1904년 <사궁내부특진관소>의 삼소·사소, <수옥헌주차 漱玉軒奏箚>, <궐외대명소 闕外待命疏>와 재소·삼소·사소 등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였다.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을 돌리고 일본 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 寄日本政府>를 발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익현[崔益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에서 발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인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를 대마도에서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내가 역사에 문외한인지.. 우리 나라가 역사를 등한시하는 것인지..
전혀 몰랐던 이야기에 더욱 전율이 느껴지는 이 기분..
이즈하라 시내 안쪽에 위치한 [수선사]
(수선사는 백제의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마을 한쪽에 있는 사찰인데 신사라기 보다는 공동 묘지에 가깝다.
우리와 달리 공동 묘지가 마을 안에 위치 한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풍습.. 우리는 가까이 있으면 불운이라하여 멀리 하지 않던가..
이러한 곳에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다.
한쪽켠에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이 단 1평의 땅이 대마도 등기부에 떡하니
최익현 선생의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단다.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 유배된 최익현 선생의 일화로
살아 생전 일본 땅은 밟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우리나라에서 흙을 가져와 신발에 넣고 지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일본에 대한 원망이 깊었는데 유배까지 오게 되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지금이야 이렇게 관광이란 명목으로 오게 되었지만
이러한 일화를 든게 되니.. 정말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은 나이에 유배되어 일본에서의 생활들에
절대적인 불복으로 단식과 함께 생활하였던 최익현 선생..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굴하지 않았던 그 모습이
그 당시의 일본인들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무언가를 남겼기에
아직도 이렇게 선생을 기리는 곳이 있건만...
모르고 지낼 우리 역사의 부분에 좀 더 세밀한 관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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